처음으로 유럽배낭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뮌헨에서 님펜부르크 궁전에 가기 위해 트램을 탔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나와 친구에게 뭐라고 말씀 하셨다. 할머니는 '헨젤과 그레텔'나오는 과자집의 마녀같이 매부리코에 날카로운 눈빛, 사마귀가 있는 얼굴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좀 무서워보였다. 우리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할머니는 점점 흥분한 듯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셨고 나는 더 무서워졌다. 우리한테 욕을 하는건가.. 저리로 가라는건가.. 화가난건가...나와 친구는 어쩔줄 몰라하며 독일어를 못한다는 말만 독일어로 연거푸 말하였다.
그때 보다못한 한 여자분께서 통역을 해주셨다. 할머니는 화를 내고 계신것도, 우리에게 욕을 하는 것도 아니셨다. 우리에게 님펜부르크와 뮌헨에서 볼 것에 대해 설명해주고 계셨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알려주고 싶으신게 너무 많았는데 말이 안통하니 속상해서 얼굴 표정이 점점 안좋아지고 계셨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영어를 못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고맙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빙긋이 웃으시는 할머니의 얼굴이 그렇게 인자해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좀전에 누구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수없이 많은 판단을 하지만 그 중 미추의 판단은 특히 시각적 감각으로 주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예술 작품들은 미와 추를 예술로 승화시켜왔고, 그 결과 청각적인 미추는 현대 음악에서 상당부분을 호불호의 영역으로 변환시킨 듯하다. 반면 시각적인 미추는 아직 강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에서도 인물묘사를 할때 외모에 대한 시각적 묘사가 빠지지 않는다. 요즘에 읽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에도 수많은 인물에 대한 외모 묘사가 자세히 그려져 있고, 미와 추에 대한 구도가 계속 그려진다. 빅터의 가족, 그리고 펠릭스의 가족들이 모두 아름답고 숭고하게 묘사되는데 반해, 빅터의 피조물과 빅터가 싫어하는 크렘페 교수는 참으로 추하게 묘사된다. <프랑켄슈타인>이 공상과학소설로 유명하지만, 나는 읽는 내내 미와 추에 대한 미학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했다. 그렇게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면서 나는 미학적 질문들이 생겼다.
첫번째 의문 : 왜 빅터는 피조물을 여러 시체를 이어붙이는 방법으로 창조하였을까?
두번째 의문 : 피조물은 자신이 추함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었을까?
세번째 의문 : 메리 셸리는 빅터와 피조물의 선악미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도우미로 움베르트 에코의 책 '추의 역사'와 '미의 역사'를 선택했다. 선정한 이유는 '추의 역사'가 집에 있었기 때문이고 '미의 역사'는 도서관에 넘쳐났기 때문이다. 신기한 것은 구립도서관들에 '추의 역사'는 한 권도 없었다. 모두 '미의 역사'만은 구비해 두었다. 움베르트 에코 또한 '추의 역사' 책의 서문에 지금껏 미의 역사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추의 역사에 대한 집필서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미와 추'는 양면의 동전과 같지만 사람들은 '미'에 관심이 더 많은 것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되어오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나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세 가지 의문을 움베르트 에코의 도움을 받아 풀어가보겠다.
첫번째 의문 : 왜 빅터는 피조물을 여러 시체를 이어붙이는 방법으로 창조하였을까?
내가 빅터라면 멀끔한 남자 시체 한 구를 외형으로 사용하고 내부 조직을 교체하는 방향으로 피조물을 만들었을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메리 셸리는 빅터에게 수고를 마다않고 시체의 여러 부분을 모아서 합치는 방법을 사용하게했다. 그리고 그 결과 피조물의 외형은 참혹하게 추하였다.
움베르트 에코의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그 결과 <추>라는 꼬리표는 자연의 이상 현상에, 예술가들이 종종 무자비하게 묘사했던 대상에 가차없이 적용되었다. 이것은 동물계에서 서로 다른 두 종이 외형적 양상이 부적절하게 혼합된 모습을 한 잡종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서구의 괴물들중 다수가 키마이라처럼 여러 동물이 섞인 모습을 지닌다. 이러한 상상의 기원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서식하고 유럽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동물들에 대한 소문들, 그리고 기형, 장애, 질병으로 변형된 신체의 부위를 가진 사람이나 동물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 후 많은 상상이 첨삭되고 섞이고 복잡해져 순수하지 않은 상태는 추한 것으로 인식 되었고 이러한 이미지가 나의 적 혹은 타자에게 덧씌워지는 경우가 생겨났다.
영화 '조조래빗'에서 보면 2차 세계대전 무렵 독일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유태인이 머리에 뿔이 달렸다고 교육하는 장면이 있다. 불과 100년도 안된 시절 이야기이다! 인간의 상상력에서 추한 모습은 점점 적대시 할 존재들에게 덧씌워져갔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여러 구조물들을 이어붙인 피조물의 모습은 이러한 서구의 역사 속 괴물을 닮았고, 또 그렇게 소외당하고 배척당한 인물들을 대변할 수 있게 된다.
두번째 의문 : 피조물은 자신이 추함을 어떻게 인지할 수 있었을까?
피조물이 펠릭스의 가족을 만나기 전까지 독일어권을 통과했다. 펠릭스 가족에게 배운 말은 프랑스어이기 때문에 피조물은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한 말을 기억한다고 해도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피조물은 어떻게 펠릭스 가족을 보고, 사피를 보고 아름답다 여기고 자신을 추하게 여겼을까?
눈이 한 개인 나라에서 눈이 두 개인 사람은 추해지듯 모든 아름다움과 추함은 상대적인 것이다. 피조물이 스스로를 추하다고 여기기 위해서는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결국 자신이 추하다는 생각을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만이 자신이 추함을 아는 길이다.
피조물은 자신이 추하다고 인식된다는 것을 펠릭스 가족들에게 말을 배우고 인간의 사상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주운 책 세 권도 인간들이 아름답다고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 배우기에 충분했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묘사하는 장면, 실락원과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다오는 많은 군상들의 묘사를 보며 피조물은 미와 추를 배웠던 것 같다. 선악과가 가져온 쓴 맛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 같다.
세번째 의문 : 메리 셸리는 빅터와 피조물의 선악미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고대부터 서구에서 아름다움을 주로 옳고 선한 것으로, 추한 것을 악하고 그른 것으로 보았던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여러 괴물을 약간 친근하게 여기던 면도 있어왔던 듯하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도깨비가 약간 친근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과 유사하게 말이다.
인간이 이러한 괴물들에 대해 두려움을 더 가지게 되고, 신의 전령으로 보지 않게 된 시기가 바로 17세기 18세기,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던 때라고 한다.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신세계들의 개척으로 사람들은 더이상 지구상의 미지의 세계를 꿈꾸지 못하게 되었다. 더이상 올림푸스에 사는 신도, 평평한 지구의 끝에 사는 괴물들도, 그리고 별자리가 된 존재들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서 기이한 생명체들의 신적인 측면이 상쇄된다. 이러한 기조에 덧붙여, 셰익스피어, 조나단 스위프트, 애드거 알렌 포, 아서 코난도일 등은 괴물등을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내기 시작하였다.
이 후의 낭만주의는 추에 대한 미학적 성찰을 재고하게 된다. 그 길을 메리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킹콩등을 시작으로 현대의 SF까지이어진다. 이러한 문학기조들이 추하고 불행하고 비참한 이들을, 또 저주받은 (신이 아닌 인간에게) 이들을 이해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주었던 것 같다.
성스럽고 후광이 비치는 고귀한 인상을 가진 빅터와 역겹고 추한 피조물의 성격에 입체감을 부여하여 고전적인 선악미추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한 것이 메리셸리의 큰 그림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선악과 미추는 일대일 대응이 아니고 실제로는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인자들임을 알려주려던 것이 아닐까..
나의 첫번째 독일 여행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어린시절 동화와 만화에서 선악미추를 주로 접했다. 권선징악을 배울때도 선한 이들이 주로 예쁘고 잘생겼다. 백설공주와 헬젤과 그레텔에 나온 마녀는 비슷하게 생겼다. 나는 아무 편견없이 이 모든 지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후에 본 영화와 드라마들도 주인공은 항상 잘생기고 예뻤다.
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잘생기고 예쁜사람이 드물..아마 없었을 듯 싶지만 독일 여행하기 전까지 내 눈에 얼마나 큰 편견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버스 안에서 만난 할머니는 나의 큰 편견을 보여준 천사였다. 물론 그 한번으로 내 편견이 다 사라지지는 못했지만 그 후에는 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리고 지금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읽으며 그때를 다시 기억해 본다. 피조물에게 나는 빅터나 펠릭스 같은 존재가 되지 않기위해 마음의 눈을 밝혀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나를위한글쓰기 #영어원서모임브이클럽
'오늘의 끄적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랑켄슈타인과 오펜하이머 (2) | 2024.01.01 |
---|---|
나와 나의 대화 (0) | 2023.12.01 |
운명에 대하여.. destiny, fate, doom (0) | 2023.11.19 |